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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宋, 960년 ~ 1279년)는 중국의 옛 나라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


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
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을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
른다. 통상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양쯔 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연남(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 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
도 한다. 수도는 카이펑(開封),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
에 의해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을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
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시기 당나라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등의 농기구을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
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등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1111년의 북송의 판도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후주 최후의 황제
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중국의 분열상태 종식을 목표로 삼았으나, 도중에 병
사했다. 동생 조광의(태종 조광의)가 뒤를 이어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의 통일을 이루고, 과
거제도의 충실을 기도했다. 과거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眞宗)시대에 완성되어졌다. 과거제도
의 확립은 황제 독제권의 확립을 가져왔고, 동시에 과도한 문관우대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을 불
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자 진종은 요나라에 대해 매년 재물을 보내는것으로 화의을 맺
었다.(단연의 맹세(澶淵之盟)또한 요나라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라는 이름의
나라을 세워 송나라에 반기을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것으로 화의을 맺었다(경
력의 화약(慶暦和約). 그 결과 획득한 평화을 토대로 경제적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국방비의 증가와 대상인, 대지주을 증가로 일어난 세수(稅收) 감소등에 대해 개혁이 촉
구되어 6대 황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왕
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리었고,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을 목표로 했
으나,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쪽 출신인 관료(구법파(舊法派)의 대반대에 부딪쳤다. 이들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하게 증가하여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기울게 하였다.
이때쯤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은 1115년 스스로 금나라을 세웠고,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함
께 요나라을 공격하자는 약속을 맺었다(해상의 맹세). 1121년 요나라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들어나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1127
년 카이펑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을 북쪽으로 사로
잡아 갔다(정강의 변(靖康之變).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천도하여 항주에서
황제을 선언했다. 이 이후부터 송나라는 남송이라고 불리었다.

1142년의 남송의 판도
조구는 1127년 즉위하여 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을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
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
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
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
으켜, 해릉왕는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해 고
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진(趙慎)이 즉위하여 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
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侂冑)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
の党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
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偽學の禁).
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을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
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
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襄
陽)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
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애산 전투).
[편집] 사회
당나라가 각지에 군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절도사의 할거을 허락하여 이윽고 오대십국시대의 전
란으로까지 이르는것을 본받아, 송나라는 과거(科挙)을 본격적으로 운영하여 명실공히 문신 관
료제가 완성되게 되었다. 황제가 사대부출신의 관료을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맡기는 체제는
황제전제,군주독제라고도 칭한다. 수나라의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제도였으나, 과거가 실제적
인 의미로써 효력을 발휘한것은 송나라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대 어느시
대보다도 매우 왕성하게 과거가 이루어진 시기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하였고, 1번에 약
3~400명이 합격하였다.
송나라의 군사제도는 위병제(傭兵制;모병제)였다. 태조는 금군(禁軍)의 제도을 고쳐 전군의 사
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장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명에 달했으나, 숫자만 많을뿐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다. 사료
에서도 중국 통일후의 송나라군의 전력(戰歷)은 승리한 전투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또한 보병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요나라 및 서하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못
하고, 많은 피해을 입었다. 또 140만에 달하는 막대한 병사을 고용하기 위해 쓰이는 군사비는
국가예산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거기에 더해서 문인중시주의 때문에 무인은 매우 경시되어 중
국 속담에서는 [좋은 철은 못에 없고, 좋은 인간은 군대에는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과적으로 병사을 모집하기 위한것에도 고생이 많아, 병사들은 죄인출신자 및 품행이 좋지않은
자들로 채워지게 되어 사기 및 규율도 낮아지게 된것으로 생각된다. 또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병
사들에게는 모두 문신이 실시되어 일반 백성들과 구별하게 하였다.
당나라때까지는 도시는 밤이되면 문을 닫고, 도시안의 각 지구도 출입을 금지하였으나, 송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폐지하여 카이펑은 밤에도 도로상에 상점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시에는
사람의 모습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편집] 문화
초기에는 [사대서](四大書)라 총칭하는 대부분의 서책 편찬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송나라에 이
르러 문학은 당나라 중기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물려받았다. 이 흐름에는 구양수에 의한 송문
학의 주류가 되어, 당송팔대가라 불리는 명문가가 활약했다. 팔대가이외로는 황정견, 범중암, 사
마광등의 이름이 열거된다. 한시(漢詩)에서는 당나라대까지의 서정시에 비해 매우 일상적이고
평이한 서사시(叙事詩)가 나오게 되었다. 또 당나라말기에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사(詞)의 분
야도 이 시기에 융성을 맞이했다. 역사분야에서는 신당서,신오대사, 그리고 사마광에 의해 편년
체로 기술된 자치통감이 있다.
과거제도의 융성으로 인해 지식인은 대부분 완전히 유교을 기초로한 인물들이 많아 송나라는 역
대 어느 왕조보다도 유학(儒學)이 강했던 시대였다. 그 유학중에도 도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었는데, 후에 주자(朱子)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경사
업이 진행되었으나, 이 경전의 대부분은 당시 말기였던 인도의 불교상황의 영향을 받아 거의 밀
교에 속하는 경전이었다.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진 강학중심의 불교는 송나라대에서는 거의 자취
를 감추고, 실천적인 교의를 가진 선종과 정토교가 융성하게 되었다. 선종은 이 시대에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교는 황실과 인연을 맺어 크게 번영하였
다. 또 민간도교였던 진대도교, 태일교, 전진교등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
송나라 시대는 수묵화, 산수화 분야의 발흥기라 할수 있어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송나라 시대
의 화단에는 2종류의 흐름이 있어 조정이 만든 한림도화원이라 불리는 국립미술 아카데미 속에
서 태어난 원체화(院体画)와 민간의 사대부에 의해 생긴 문인화(文人画)등 2개가 바로 그것이
다. 또 책의 분야에서는 송나라의 4대가라 일컫어지는 소철, , 황정견, 채양 4사람을 열거하는
데, 휘종과 그의 재상이던 채경도 포함될 수 있다. 휘종은 금체라고 불리는 필체을 만들기도 했
다. 도자기 분야에서는 현재도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경덕진이 청백자의 생산을 계기로 일대 생
산지가 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북송 시대에는 궁정용 의 청자, 올리브 녹색의 유약으로 알려진
요주 의 청자 및 백자 최고걸작이 나오던 하북성 , 백지흑
[편집] 경제
이 시기에 이르러 강남의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성장하여 화북은 소비사회로써 강남에서 올라온
식료품으로 지탱하는 상황이 되었다.
송나라는 농업, 상업상에서 현저한 변혁이 보여진 시기였고, 송나라의 경제력은 매우 높았던 것
으로 생각된다. 요나라와의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재물은 비단 20만필, 은 10만
량이라고 알려진 액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액임에는 틀림없으나(은은 일괄적으로 보면 약
11톤), 진종이 봉선의식을 거행할때 사용한 비용은 단연의 맹세에 지불한 액수의 60배에 달한
다고 한다.
중국 인구는 전한말기이후 전쟁으로 인해 감소와 증가을 되풀이하여 인구는 6천만명을 넘는 일
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북송때에 이르러 6천만명을 돌파하고 1080년의 계산으로는 9천만명
에 이르렀다. 그 이후 1억을 한계점으로써 청나라시대까지 감소와 증가을 다시 되풀이하게 되었
다. 이 거대한 인구을 지탱한것은 새로운 농업이었다. 당나라때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등의 농기
구을 배경으로 남쪽의 베트남에서 전해진 점성도라 불린 안정성이 있는 조도가 도입되었고, 또
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중국 전역의 경제의 중심점은 이 시기부터 확실히 화북에
서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거기에 지역에 따라 차, 과수, 양잠등의 생산이 활발하게 진행되
어 농업의 분업화가 진행되었다.
식료의 증산에 따라 이것을 운반하기 위한 수운(水運)도 빠르게 발달하였다. 매우 세밀한 운하
망이 구축되어져 운하는 전국의 ¾ 지역을 망라했다. 수도 카이펑은 이 운하을 사용하는것을 전
제로 한 도시였기에 내부을 운하로 관통할 수 있었다. 또 이때까지 경시했던 해운기술이 대폭적
으로 향상되어 정크선이 개발되어 일본, 조선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
을 무대로 교역망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자의 증산과 교통망의 정비는 상업을 활발화시켰다. 상인길드가 탄생하고, 상업형식이 정비되
어졌다. 이것과 함께 약속어음이 운용되어져 사천, 섬서지역에서는 세계 최초의 지폐라 할 수 있
는 교자(交子)가 발행되어 유통되었다.

개중법
홍무 3년 산서성의 참정 양헌이 주원장에게 상서를 올려 개중법 채택을 건의
개중제는 북송에서 시행했던 절중제와 유사하다. 상인들이 군량과 기타 군수물자를 북방지역의
변경지역으로 운반하면, 그 운송한 양식만큼 염인과 바꿔줬다. 상인들은 이 염인을 지정된 제염
소에 가지고 가서 소금과 바꾼 후 다시 지정된 장소에 가서 판매했다. 주원장은 이를 받아들여
대동에 군량 한섬, 혹은 태원에 군량 한섬 서말을 바치면 염인 하나를 주도록 했다. 당시 염인 하
나는 소금 200근과 교환이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이는 곡식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장사꾼들은 이 정책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또 변경 지방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내륙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자연스럽게 공존하지 못했다. 개중법은 16세기 초 다시 부활했지만
이는 명목적인 부활이었을 뿐 1617년 소금생산지 회남에서는 급기야 이법을 폐지시켜버렸다.

원 [元] 의 개요: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
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
(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
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
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
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
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
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
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
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
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
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
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
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
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
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
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
(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
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6. 몽골제국 [蒙古帝國(몽고제국)] : 13세기 초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세운 몽골민족 지배 아래


의 제국.
12세기 중엽 몽골고원의 오논·케룰렌 두 강 사이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할거(割
據)하고 있던 몽골계·투르크계의 씨족 및 부족 중의 한 몽골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은
1189년경 자기 부족과 이어 몽골 여러 씨족을 통일하고 그 맹주(盟主)로 추대되어 1206년 칭
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주변의 타타르·메르키트·케레이트 등 부족들
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또한 서방의 알타이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대항하던 투르크계의 나이
만 부족을 멸망시켜 세력을 확대하여, 몽골고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대칸[大汗]의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
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
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단위였
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천호장(千戶長)과 백호장(百戶長)에는 공신(功臣)을 임명하고, 그것을 좌익(興安嶺 방면)·중군
(中軍)·우익(알타이 방면)의 총지휘관 만호장(萬戶長)의 지휘하에 두었다. 만호장·천호장·백호
장의 자제는 케시크티라 불린 대칸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칭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칭기즈칸은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금(金)나라·서하(西夏) 등 남쪽방면의 농
경지역에 침입하여 말·낙타·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
대로 강제 이주시켜 촌락을 이루었다. 또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는 동서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방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먼저 그는 나이만 부족 족장의 왕자 쿠츨루크가 서요(西遼)로 망
명하여 그곳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어 서(西)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로 자임(自任)한 호라즘 샤왕조에 통상사절단을 파견하
였다. 그러나 사절단 일행이 학살된 것을 계기로 삼아 서방세계에 대한 대원정(大遠
征:1219∼1225)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호라즘 국왕은 전사하고, 그의 왕자도 패하여 인도지방
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한 후 귀국하였다. 칭기즈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다가 1227년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칭기즈칸은 서방 원정에서 승전하고 개선한 후, 영토 중 유목지역은 그의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
게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즉, 몽골 본토는 칭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아들 툴루
이에게 계승하기로 결정하였고, 맏아들 주치(Juchi, 朮赤)에게는 카스피해(海)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南)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분할하여 주었으며(후의 킵차크한국), 둘째아들 차
가타이에게는 아무강(江) 평지이며 서요(西遼)의 옛 땅인 중앙아시아를 나누어 주었다(후의 차
가타이한국).
또 셋째아들 오고타이(후의 제2대 황제 太宗)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산맥[天山山脈]에 걸친 나이만 부족의 옛 땅인 몽골고원 일대를 나누어주었다(후의 오고타
이한국).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중국의 북동지구(만주지방) 방면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통
치하게 하였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그것을 그들 일족의 공유재산(共有財産)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達魯花赤: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徵稅) 임무를 맡게 하였다.
칸(汗)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 칭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그가 죽자 쿠릴타이는 칭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
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 오고타이는 금(金)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
망시키고, 1234년에는 화이허강[淮河] 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 한편 서방에 대해서는 주치
의 둘째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 1235∼42년에 토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남(南)러시아는 몽골제국 지배하의 킵차크한국이 되었다. 태종(太宗) 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
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구축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전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
하고 그 연도(沿道)에 역전(驛傳)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
게 소통되고 편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
또 오고타이칸은 옐뤼 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
고, 또한 최초의 정액세법(定額稅法)을 시행하였다. 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 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3대의 대칸위에 오른 뒤 3년 만에 죽자 다시 황후가 섭정
이 되었다. 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
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
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
하여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결국 툴루이측이 승리를 거두어 몽케가 제4대의 대칸위에 올랐다.
그 후 툴루이의 자손이 몽골제국 → 원조(元朝:1271∼1368)의 대칸위를 독점하였다. 그러나 이
와 같은 일족 내부에서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몽케칸은 오고타이칸의 사후 약 10년간 난맥상태를 이룬 통치기구를 쇄신하여 관제를 개혁하였
으며, 중국의 화북(華北) 지방과 투르키스탄의 요지를 확보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제(稅
制)를 개정하였다. 그는 국내의 재통일에 성공하자, 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의 쓰촨[泗川] ·윈난
[雲南] 및 안난[安南] ·티베트[西藏] 등의 토벌을 위해 대군을 출동하게 했고, 셋째동생 훌라구를
이슬람국가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훌라구는 1253년 서방정벌에 나서, 이란에 침입하여 바그
다드를 공략하고, 58년 아바스왕조를 멸망시켜 이곳 이란 지역에 일한국(1258∼1393)을 건국
하였다. 한편 1231년 이래 3차례의 공략에도 굴복하지 않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53년 대군
을 파견하여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몽케칸도 남송(南宋)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제4대의 몽케
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부카
는, 그의 부하와 오고타이계 제왕(諸王)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쿠빌라
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
대를 받아 제5대 대칸위에 올랐다. 그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를 칸으로 추대
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한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칭기
즈칸이 이루어놓은 몽골제국은 분열하였다.
결국 쿠빌라이칸이 승리하였지만(1303), 이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가 모두 죽은 뒤였
다. 이 싸움은 유목 ·농경 양 지역을 영유함으로써 크게 개화(開化)한 원조(元朝) 및 일한국과,
유목지대를 본거지로 삼고 종래의 유목적 전통생활을 보존하려 한 여러 한국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조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
제국의 상호 연대성이 부활되었다. 원조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오고타이한국을 제외한 다른 킵차크 ·차가타이 ·일 등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
써 그로부터 거의 6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타타르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문화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
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었다. 이 연합왕국도 원나라의
멸망(1368)과 함께 붕괴하였다.


청(淸)왕조는 만주인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인은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여진이라고도 불린다. 그
일부가 화북에 진출하여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는 점차 정착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 명조 말기
에는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의 사냥기술은 대단히 뛰어났는데 이
사냥 기술을 전투에 이용한 것이 팔기제도이다. 여진기병은 대단히 강인하여 '천명의 중국병사
가 한명의 여진기병을 이겨낼 수 없다'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명 말기 임진왜란 출병 등 '만력의 3대정'으로 만주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추장


이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스스로 한의 위에 올랐다. 누르하치
(청 태조)는 명을 계속 공격하는 등 청나라의 기반을 닦은 후 2대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후금제
국을 넘겨주었다. 이후 그는 조선을 두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강화를 성사시켰으며(병자호란)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제위에 올렸다.

이때 이자성을 주축으로한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황도에 진입하여 명(明)을 멸망시키게


된다. 청나라에 대한 방비를 위해 산해관에 전진배치되어 있던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북경으로 인도했다. 오삼계는 북경을 공략하여 대승하였으며 이자성 세력은 서안으로 후퇴하다
청 군대의 추격을 받고 호북으로 달아난다. 이로써 중원은 청나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24세의 나이로 젊은 순치제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랐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인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이다. 강희제는 나이 16세가 되던 해 스스로 친정을 선
언하고 직접 정사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청은 번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변방의 방비를 맡기고 있었는데 유력한 군벌을 왕에 봉하여


번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번세력들이 점점 강해져 막대한 부와 강한 군대까지 거느리며 황도
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강희제는 번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번세력이었던 오삼계가 이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오삼계는 다른 3번세력을 모두 모아 막
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청 왕조를 위협하였는데, 이에 강희제는 팔기군을 소집하고 선교사로 북
경에 머물던 베르비스트에게 명해 경량 대포를 각 전선에 조달하도록 하였다. 강희제는 각 전황
을 모두 조사하여 친히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장기전을 펼쳤다.

명 황실을 스스로 배신했던 오삼계는 명을 다시 재건한다는 모순된 명분으로 반란군을 일으켰는


데 이런 명분으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나이가 70을 바라보게 되면서 다급해
진 오삼계는 국호를 주(周)라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만 같은 해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이후
반란군은 힘없이 모두 무너졌으며 8년 여에 걸친 '3번의 난'이 평정되었다.

강희제는 또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조선과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 경계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서삼경
은 물론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학문도 배워나갔다. 또한 궁중의 화장품과 향응비를
모두 없애고 환관, 궁녀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자신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다. 치국에
도 힘써 황하 치수 공사를 완성하였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와 소작료를 감면하게 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썼다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5대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선대 2대에 걸친 선정 덕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건륭제는 티벳, 미얀마, 베트남 원정 등을 통하여 청나라의 영토를 최대로 만들어 동아시아 전역
을 지배했으며, 사고전서의 편찬 등의 문화 사업과 내정에도 충실하여 선대 2대에 이어 청대 최
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쇠퇴와멸망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 즉위 1년 만에 각지에서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백련교


도의 난은 10년 동안 계속 되는데 이 난으로 청 팔기군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그 동안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아편중독자가
급증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도광제는 임칙서에게 아편금연대업을 맡기게
된다. 이에 임칙서는 광주에 부임하여 아편 밀매자들을 처벌하고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튜나 호
를 억류하여 튜나 호에 있던 아편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이에 영국 의회가 소집되어 전쟁을 결
의하였으며 2년 간에 걸친 '아편 전쟁' 끝에 청나라는 패배하여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게
되며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주,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게 되었다.(1844)

1851년 청나라 내부에서도 불만이 가중되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이들은 기독교의 천국


을 지상에 건설한다는 취지로 태평천국이란 나라를 건국했으며 북상을 거듭하여 남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천경이라 개칭하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도 민생은 안정되
지 않았고 내분이 발생하여 세력이 약해져 갔다. 결국 이홍장 등의 한인 관료가 조직한 향용 등
에 의해 태평천국의 난은 진압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난 이홍장은 상해에 서구식 무기 공장을 세워 가동하는 등 서양 것을


배워 근대화를 하자는 '양무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사회, 정치적인 개혁은 하지
않고 무력적인 것에만 제한되었다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구의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체계도 개혁해야 한다는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무술


변법)이 일어나 황제 광서제의 동조까지 받았으나 서태후 등 수구파의 반대로 100일 만에 막을
내리는데 이것을 100일 유신이라 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들이 봉기하여 외세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의화단이라


는 비밀결사단이 만들어져 서구를 타도하였으며 "청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멸한다"는 구호를 내
세워 세력을 확장시켰다. 의화단 세력이 수도 북경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 러시아, 일
본 등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하여 의화단을 모조리 처형하였으며 청은 이후 열강의 식민진
출에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후 청나라는 유명무실한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신세가
되며 1912년 손문의 신해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
의의 퇴위와 함께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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